- 251026 이덴 유주르 井殿謙 목사 | 교제 가운데 | 눅10:38-42
- 운영자 2025.10.24 조회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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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가운데
눅 10:38−42 | 이데 유주르 목사
1 인사
안녕하세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유. 정말 좋은 날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제는 3.1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대해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 일본의 행위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품으면서, 앞으로도 이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한 다음 세대에도 제대로 전해가야 할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이번 교류 프로그램에 초대해 주시고 만남의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 마르다에게서 발견되는 우리의 모습
마르다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도 우리가 특별하게 공감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였던 마르다입니다만,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해지면서 점점 일하지 않은 동생 마리아에게 그만 화를 내고 마는 그런 인물입니다.
"주님! 제 동생은 가만히 있고 저 혼자만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것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책망하며 주의를 주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하지요.
처음에는 기뻐서 봉사를 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 일하는거 같아"라는 짜증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해야하는 주일에 기쁨보다는 교회봉사로 바빠서 지치고, 피곤해지는 경우가 있지요.
또한 마르다는 남과 비교하는 것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마르다의 접대는 정말 중요한 봉사였지만, 나와 다른 남과 비교를 시작하며 불평불만이 생겨났고, 마음도 흐트러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가족이나 친구,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로 인해 나 자신을 판단하고 스스로를 상처내고 맙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다와 나 자신이 겹치는 부분이 꽤 많치 않나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마르다는 분명, 책임감도 있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이 교회에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라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3 마르다를 향한 새로운 시선
하지만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을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생각하게 되지만,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의 곁에서 말씀에 참여합시다, 라고 말하죠.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버릴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르다의 모습에서도 본받을 부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르다에게 배워야 할 점은 인간적인 감정을 예수님께 아주 가까이 가서 털어놓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마르다와 예수님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마르다라는 인물을 따라가면 열심히 봉사하고, 여러가지 일들에 신경쓰는 인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생과 함께 생활하였기에 "장녀로써 내가 잘해야해"라는 책임감을 상상할수 있습니다.
그런 마르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좀 들어 보세요!"라고 약간 떼쓰는 듯한 형태로 말합니다.
마치 어린 누나가 부모님한테 고자질하러가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똑 부러지는 그녀가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예수님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르다가 예수님께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런 귀여움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보인다면 우린 마르다를 더욱 깊이받아들이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마르다를 예수님은 사랑스럽게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컸기 때문에 화가났던 것이지요. 그 안 좋은 마음을 예수님께 전달하였고, 예수님 또한 그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동생 마리아와는 다른 교제를 예수님과 이루게 되었던 것이죠.
오늘 본문의 뒷이야기에 대해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만, 분명 예수님은 접대하는 일에 지쳐있는 마르다에게도, 마리아에게 했던 것처럼 같은 말을 건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 너무 수고 많았다. 너를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란다." 예수님은 이렇게 마르다에게도 다정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4 주님으로 말미암은 다양한 교제
마르다처럼 예수님께 분노를 표하기도하고,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일에 약해져있던 우리를 예수님은 꼭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어떤 때에도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어 있으며, 그분께 말씀을 받고 걸어가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가운데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거나, 타인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긴 불편한 감정을 하나님께 표출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야 말로 예수님곁으로 나아가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하는 병행구절, 요한복음을 보면 실은 이 두여성이 각각의 역할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각각 다른 형태로 예수님의 소중한 말씀이 선포되었던 것이죠.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교회안에 마리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마르다만 있어도 안되지요.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깝지만 서로가 다른 역사와 생활을 가지고 있지요.
교회라는 이곳에 우리모두가 마리아처럼 마르다처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렇치만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제각각, 다른 봉사를 하는 이곳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나아갈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새로운 교제가 이룰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각각의 장소에서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회안에서, 그리고 세상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율법을 실천하며 나아가길 진정으로 소망합니다.
日本語(Japanese)
タイトル : 交わりの中で
聖書箇所 : ルカによる福音書10章38−42節
1 挨拶
アニョハセユーー。
今日この素晴らしい日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様に感謝いたします。
昨日は、3.1運動について、そして関東大震災について学ばせていただきました。
私たち日本のこれまでの行為の反省と謝罪の意を持ちつつ、これから改めて私たちはこのことを忘れずに覚えて、また次の世代にもきちんと私たちが伝え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と感じました。
皆さま、この度は、交流プログラムにお招きくださり、出会いの時が与えられましたこと、心から感謝いたします。
今日はマルタとマリアの話から神様の御言葉にあずかりたいと思います。
2 マルタから発見される私たちの姿
マルタの姿は、聖書に登場する人の中でも、特に私たちが共感しやすい人物です。イエス様を喜んで家に迎えたマルタでしたが、次第に「もてなしのために気が落ち着か」なくなり働かない妹マリヤへ怒り始めます。
さらには「主よ、妹が私だけにもてなしをさせているのを何とも思われないのですか」と、注意しないイエス様にも怒りが向かっていきます。
私たちも同じような経験をします。
最初は喜びの内に奉仕を始めたはずが、いつの間にか「自分ばかりが頑張っている」という苛立ちに変わってしまう。
心を落ち着かせるはずの日曜日も、喜びよりも、奉仕の忙しさに疲れてしまう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
また、マルタは人と比較することに囚われます。
マルタのもてなし自体は大切な働きでしたが、他人と比べたときに怒りや不満が生まれ、心も乱れてしまいます。私たちにおいても、家族や友人、周りの人々と比べて苦しむことが多いものです。自分で自分を裁き、傷つくこともあります。
そのような中で、マルタに自らを重ねる方も多い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イエス様をもてなすために、一生懸命働く姿は好感が持てますし、きっと責任感もあり、よく気が効く人であったんだろうと思います。こんな方が教会にいてくれたら助かる!というような人物でもあるのかなと思ったりいたします。
3 マルタに向けた新たな眼差し
しかし、一般的に今日の聖書箇所を読み解くのであれば、よく言われるのが、マルタではなくマリアが良い方を選んだのだ。マリアを見習って主の身元で御言葉に預かりましょう。というものです。
しかし、今日は少し違う見方をしてみたいと思います。聖書に描かれていることで、無駄なものはありません。そう考えてみると、マルタの姿からも、私たちが示されることがある、と思うのです。
私たちに示されている、マルタから学ぶべき姿は、人間らしい気持ちを、イエス様の所に近づいて伝えた、というところです。
今日の箇所を読んで、私はマルタとイエス様との距離の近さを感じました。
マルタの人物像を考えてみると、聖書にある通り、頑張ってもてなしの準備をしたり、色々なことによく気がついて動ける人です。何もしない妹とずっと一緒に生活する中で、自分がちゃんとしないと!という長女としての責任感もあったかもしれません。
そんなしっかり者な印象を受けるがマルタです。しかし今日の箇所では、「聞いてくださいよ!」とイエス様にだだをこねるような形で、語りかけます。
まるで、小さいお姉ちゃんが親に妹のことを言いつけに行ったような姿です。
そのように、しっかり者の彼女が、唯一弱さを見せることができる相手がイエス様であったのではないか。マルタがイエスさまに甘えているような、そんな可愛らしさが見えてくるのです。
そうすると、よりマルタの姿が味わい深くなっていきます。
そのようなマルタをイエス様は「マルタ、マルタ」と愛を持って名前を呼んで受け入れました。
マルタは一生懸命であったからこそ、主を迎えるために必死になっていました。その気持ちが大きいからこそ、怒りも湧いてきました。それをイエス様に伝えたのは、イエス様に心を開き信頼している故でありました。そのようなマルタをイエス様は受け止めて、妹マリアとは違った関係性、イエス様とマルタの間だけの良き交わりを築いていきました。
今日の聖書箇所の続きは描かれていませんが、きっとイエス様は、働きを終えて疲れたマルタにも、マリアにしたように、再び語られた思うのです。
「一生懸命私のために働いてくれたんだね。」「あなたのためにも私はあるんだよ。」と、そんなことを語りながら、マルタとも優しく関わっていったと思います。
4 主による様々な交わり
マルタのように怒ったり、弱さを抱える私たちのことも、イエス様は受け止めてくださるのです。
そしてそれだけではなく、愛を持って一人一人の名前を呼んでくださり、本当に大切なものは何かを、優しく語りかけてくださいます。
私たちはどのような時も、主のそばに行くことが赦されており、主に近付いて御言葉を受けることへと招か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の人生の中には、人と比較して苦しんだり、自分や人を裁いたり、神様にも怒りを向けてしまうような時があります。
けれども、そのような時にこそ、イエス様の御元に行くことによって、御言葉をいただくことによって、私たちは絶えず変えられていくのです。イエス様はそのように私たちを大きな愛で私たちを包んで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また、『ヨハネ福音書』の別の記事を観ると、マルタとマリアでそれぞれの役割があることが思わされます。マルタとマリアへそれぞれ違った形でイエス様の大切な御言葉が語られています。
今日の箇所では、マリアの方が良い方を選んだとありますが、本当に教会の中にマリアのような人ばかりだと、何も進んで行きません。
逆にマルタばっかりでもダメだとも思います。
そのような色々な人が集まっている場所が私たちの教会です。
特に今、私たちは国の境を超えて、韓国と日本合同で共に礼拝を守っています。
近くの国ではありますけれども、歩んできた歴史も生活も人もそれぞれ違います。
私たちそれぞれ違う性格の、色々な人が集まっている、この教会という場所でありますが、マリアのようでもマルタのようでも、またそれぞれの国において様々な人がいるけれども、その中で一つの教会という場所に集った私たちです。
そんな私たちが大切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真っ直ぐに主を見つめて、主の御元に近付いていくことです。
そして色々な人が集まっている中で、それぞれ違った働きをしつつ、互いを尊重し大切にしながら歩んでいくことが大切であると思うのです。そのような時、イエス様は私たちを受け止めてくださり、名前を呼んで、それぞれ違った形で交わりを築いていきます。そのことが示されている私たち、それぞれに違った交わりの中で、主との関係性を築い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主がそのように私たちを受け止めて関わってくださるからこそ、私たちも互いを受け止めて、それぞれに大切な交わりを持っていきたいと思うのです。
主が最も大切なものとして教えてくださった、「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との教えを実現していく私たち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韓国と日本という離れた場所で、同じように、主を見つめ、主の御元に集う、一つの教会という場所で、私たち、互いに愛し合いながら、それぞれの交わりを大切にしながら、歩んでいきたい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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