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강 야고보서(3) 믿음의 행함(믿음과 행위의 관계) | admin | 2012-09-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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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강 야고보서(3) 믿음과 행함 (약 2:14-26, 개정)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과 율법(행함)의 관계는 오랫동안 교회의 논쟁거리였습니다. 구원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더욱 논쟁이 치열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된 책일까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의 신학은 오히려 바울서신과 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1. 도(믿음)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약1:19-27) 야고보는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터의 이신득의 사상과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시키고 행해야 하며, 특히 말하고 듣는 행동을 어떻게 하며, 행함이 있는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1) 온전한 경건은 내적/외적 경건이 동시에 이루져야 하고 상호 보완적이어야 합니다. 온전한 경건은 종교개혁자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비판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학자 바클레이(Barclay)는 그리스도교 안에도 윤리적인 요구가 있으며 이러한 윤리적인 요구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합니다. 종교개혁을 한 위대한 신학자의 견해라고 해서 모두 옳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를 평가절하한 루터의 견해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자들 모두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특히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하라고 명하는데, 이것는 잠13:31에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삶의 교훈이며 외적 경건과 더불어 내적 경건에 힘써야 온전한 경건을 이룰 수 있습니다(약1:27) 2) 경건의 삶을 통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서로 보완됩니다. 현대를 PR 시대라고 부릅니다. 자기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손해보는 시대며, 법정에서도 말 잘하는 변호사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신득의의 복음을 장식물로 생각하는 자들과 이신득의 사상을 잘못 받아들여 죄짓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때 야고보는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켜 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약2:1-13) 야고보서는 오늘날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1) 사람은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대부분은 비천한 자들과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부자나 고위층의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이는 귀한 전리품을 다루듯이 하여 자연적으로 교회 내에서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바리새인들이 흠을 잡을 수 없었던 부분은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을 하지 않은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율법을 이웃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게 됩니다(약2:13).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인은 좇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2) 교회 안에서의 모든 성도는 평등합니다. 최근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 교회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게 되면 이는 교회의 자랑이 되고 부흥의 원인이 됩니다. 즉 교회가 사회의 계층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이때에 일부 교회에서 건축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어려울 때일수록 어느 부자든 교회에 등록하여 헌금을 많이 내기를 목회자들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14-26) 바울이 이신득의 교리를 가르칠 때 인용한 구약의 인용(아브라함)을 야고보도 인용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합니다. 1) 야고보서는 믿음안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 상충된다 본 것입니다. 그러나 주석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합니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며,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말합니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행함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치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삽니다. 예를들면,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을 은혜를 남용하고 있는데, 독일신학자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말합니다. 크리스챤은 크리스챤다워지려면, 주님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입니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루터는 로마카톨릭의 교권과 권력 그리고 규칙(율법조항)과 행동에 반대하며 평신도들의 믿음과 고백을 강조했는데, 종교개혁자 루터도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언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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