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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03 용서의 영성 이재경 201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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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훈련03 : 용서의 영성

 

(6:37-38, 개정)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19:11, 개정)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2:17-21, 개정)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어느 교회에 교회 이전 문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감정싸움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평소 다정하게 지냈던 사이었으나, 만날 때마다 힘들고 속상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주장이 정의로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쪽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람들 역시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종종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내가 화난 것은 당신이 이런 이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화내는 것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정당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여러번 주님의 용서하라는 주님 말씀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 수 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크리스챤은 용서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용서의 영성을 가져야 살 수 있습니다. 상대를 향한 미움이 내 안에 남아 있는 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미움은 결국 나를 해치는 칼이 되어 나를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야 합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기록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내 뜻이 그러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용납이 되지 않지만, 주님의 명령이기에 그리하는 것입니다.

12:17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되레 선한 일을 하고 화평하게 지내려고 애쓰는 것은 내 마음이 허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19;11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슬기로운 일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용서냐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자발적 용서가 아니기에 위선이라 다그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미운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분한 마음을 거둘 수 있을까요?

 

용서를 상대방이 받아 드리는 것에 따라 우월감을 가지거나, 받아드리지 않으므로 포악해진다면, 그것은 위선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받아드리든 말든, 그것과 무관하게 성경대로 상대로 용서하고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기적을 낳습니다.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6:37)

 

희생자 피해자들의 입장을 견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할 말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질책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정의감이 항상 좋은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정의는 용서라는 사랑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을 정죄하는 칼날이 되지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의감은 종종 폭력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엡4:26에 화내더라도 죄짓지 말고, 해지도록 분한 마음을 품고 있지 말라 했습니다.

화낼 수 있는 권리는 해 질 때까지이고, 그 이상은 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앙은 해지도록 분한 마음을 품고 자리에 눕는 것이 얼마나 좋은 않은 것인지 깨닫는 과정일 수 도 있습니다.

참으로 기도할 일입니다. 용서의 영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보복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당장 화내고, 분노하면 속이 후련해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실제로 직접적인 복수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계속되는 증오와 복수와 고통만을 재생산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2:19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 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증거합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직접 너희 손으로 복수하지 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맡 겨 드리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분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실 때에, 직접 그분의 방식대로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원수 갚을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습니까? 또한 다윗의 시편 중에는 소위 말하는 저주 시편이 많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고 괴롭히는 원수들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눈물 로 통곡하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복수할만한 힘도 권리도 없으니, 하나님께 일어나셔서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심판해주기를 기도하면서,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서 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 복수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월권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그에 따른 두려움만 가중시킬 뿐, 결코 분노의 원인 자체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사정과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 원수 갚음의 주도권을 내어드리고, 그분만을 신실하게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 고백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을 가는 길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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