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06 기도의 영성 | 이재경 | 2016-02-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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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훈련06 : 기도의 영성 마 6:5-6, 개정)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더 4:15-17, 개정)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살전 5:16-18, 개정)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님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도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골방입니다. 골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골방은 무엇보다 위선자의 기도처와 대조되는 곳입니다. 오늘 마6:5절에 위선자처럼 기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위선자라 번역한 곳은 희랍어로 ‘연극배우’라는 언어에서 나왔습니다. 위선자는 연극배우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기도를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무대에 섭니다. 무대앞에 관객이 있습니다. 배우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연기는 관객을 감동하게 합니다.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의 연기는 끝납니다. 그러나 무대위의 그 사람과 무대 아래의 그 사람은 다릅니다. 위아래가 다른 사람, 안과 밖이 다른 사람, 표리부동한 사람을 위선자라 합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받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영성은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어떠한 기도와 영성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골방의 기도 : 하나님은 나와 직접 대면하는 기도의 영성을 원하십니다. 배우가 연기를 잘 해야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인기도 높아지고, 출연료도 치솟게 됩니다. 요즘 정치인들도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아름다움으로 형상화하며 표현하려 애씁니다. 사업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요즘 시대를 “연출의 시대”라 하지 않습니까? 신앙도 시대적 연출이 지상과제가 되었습니다. 무한 경쟁시대에 성공하고 싶다면, 무대 연출에 성공해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앙을 연출로 살려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거룩하게 서 있는 성전이 사라진 시대에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신앙을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제사 드릴 장소가 사라졌을 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엇보다 기도를 택했습니다. 먼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기도문은 세련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듬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시간을 정했습니다. 해뜨는 시간과 지는 시간, 하루의 시작과 마감을 기도로 채웠습니다. 성전 제물을 올리는 시간 오후 3시, 나팔소리가 울리면 모든 것을 멈추고, 서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자세와 장소도 훌륭했습니다. 회당에 모여 기도하고 큰 길 모퉁이와 대문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격정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이른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바리새파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유대민족의 중심에 우쭉 서게 되어 있습니다.(탁월한 연출, 훌륭한 연기, 그리고 성공?!) 적어도 우리에게는 바리새인 만큼의 영성이 요청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골방에서 들어가 문을 닫으라!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잘 꾸며진 무대가 없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대본도 연출도 없습니다. 판에 밖힌 어설픈 연기도, 관객을 자빠뜨리는 천박한 배우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나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야 하는 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 합니까? 어디서 기도합니까? 우리에게는 순전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골방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주님안에, 주님이 내안에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안에 어떤 것이라도 들어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기도입니다. 둘째. 생명기도 : 하나님은 생명을 걸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14절에 모르드게는 “네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며 에스더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앞에 허락없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앞에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때, 에스더는 16절에 모르드게에게 “당신은 수간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생명을 건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죽으면 죽으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고 죽음을 각오한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죽음을 각오하며 기도를 할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자는 생명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두가지 역사나 나타납니다. 첫째는 에스더와 유대민족이 주님앞에서 사망권세 이기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르드게에게 의지하기만 해고, 순종하기만 했던, 유약한 에스더가 모르드게에게 신앙적으로 기도요청을 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더 충만해져 신앙적으로 명령하기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기도의 영성은 첫째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끌어냈다는 것이고, 둘째 믿음의 리더쉽를 발휘하여 동역자와 백성을 결집시켜 생명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대면하는 것이요, 생명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매일매일 기도를 통해서 행하신 일이요, 게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상에서 드리신 기도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데살로니카교회에게 생명을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편지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영성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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