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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강 개혁자 요시야왕 admin 201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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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강 개혁의 왕 요시야

한권의 율법서로 인생을 구원받은 회개의 왕

 

(왕하 22:1-20, 개정) 『[1]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7] 그러나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니라 [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요시야

 

요시야는 “여호와가 그를 지지하심”의 뜻으로 므낫세손자/아몬의아들로 8세때 유다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는 청소년시기부터 제사장 힐기야의 가르침을 잘 받아, 즉위12년에 남유다에 철저한 우상타파, 18년에 벧엘에서 북이스라엘에게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나, 앗수르를 두려워한 나머지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르느고와 전쟁했으며, 그 결과 부상으로 예루살렘 귀환후 생을 마감합니다.

 

1.다윗의 길로 행한 요시야

나이 8세에 즉위한 요시야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그의 경건함은 그의 통치 30년간 시종일관 한결같았으며 아사왕과 여호사밧(대하17:3)과 히스기야(대하29:2)와 더불어 다윗의 길로 행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솔로몬왕은 처음에는 하나님앞에 겸비하여 잘 섬겼으나, 말년에 타락하여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졌고, 다른 유다왕들은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암의 길과 바알을 섬긴 오므리왕조의 길로 갔지만, 이에 반해, 요시야는 다윗의 길로 행한 왕이었습니다.

 

2.유다와 이스라엘을 숙청한 요시야

요시야는 유다 열왕이 세운 단들과 산당을 철저히 제거하였는데, 특히 므낫세때의 일월성신(태양신,대하21:1-6)을 제거합니다. 므낫세가 회개하여 한 때, 이 단을 제거했지만, 부수지 않았기에 아몬이 다시 세웠고(대하33:22) 요시야는 두 번다시 가증한 우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단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물에 흘려 보냈을 뿐만 아니라, 일월성신에 바친 말들을 제하고(왕하23:10-11) 행군의식으로 사용된 태양수레를 불살라 버리고, 솔로몬때 세워진 시돈의 우상 아스다롯상과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블레셋의 다곤 신상들을 비롯하여, 그 이외에 석상과 아세라목상을 찍어버리고 그곳을 사람(부정한 제사장들)의 해골로 채웁니다. 이러한 철저한 종교개혁은 제사장 힐기야로부터 확고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시야의 행적은 북이스라엘의 창시자, 여로보암때에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왕 여로보암이 백성들(10개지파)이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가다보면, 민심이 유다왕에게 쏠릴 것을 염려하여 아론처럼,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상을 만드는데, 이에 유다에서 온 한 선지자가 여로보암에게 경고하기를 유다의 요시야라는 왕이 나타나서 그 제단을 제사장들의 피로 물들이고, 죽은 자들의 뼈를 그 위에 뿌리겠다고 예언했던 것(왕상13:1-10)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삼백년뒤에 이 일이 성취되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멸망에서 구원한 요시야

 

1)여선지 훌다의 예언

하나님은 여선지 훌다를 통해 유다백성과 왕이 하나님앞에 죄악을 쌓으므로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 예언하는데, 요시야왕이 성전수리도중 발견된 율법책을 읽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유다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금송아지,바알신숭배,통혼,강대국의존:여호화신앙부재) 그러나 훌다의 예언은 새로운 것은 아니고, 이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에 대한 확인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2)멸망해야 할 유다

출애굽후에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과 시내산 언약(레26:12)을 맺었으나, 그 언약관계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언약의 말씀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 언약을 지켜 행하며 복을 받고 그 명령을 준행치 않고 배반하면 징벌을 내리게 될 것이라(레26:3,14-15)는 말씀대로 유다백성을 그 언약을 어김으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인데, 유다백성은 하나님은 버리고 금송아지, 바알신을 섬기며 음행하였으므로 멸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요시야왕을 보고 구원함

하나님은 훌다를 통하여 심판을 예언했지만, 요시야왕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풉니다. 하나님앞에서 정직성실했던 요시야는 유다의 재앙과 수치를 체험하지 않고 평안히 조상의 묘실로 들어갈 것이며, 그 후에야 유다의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나라와 민족의 멸망을 본다는 것은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애굽의 바르느고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는데, 요시야의 생명을 거둬가심으로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인간의 죽음까지도 축복되게 하시는데, 그 섭리와 역사가 오묘해서 인간이 이해하기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심판중에도 요시야에게 관용을 베푸신 것은 요시야의 회개 때문입니다. 요시야가 성전수리도중 율법서를 읽고 통곡하며 옷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유다는 멸망하지만, 회개하는 요시야는 하나님의 궁휼하심을 입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합니다. 심지어는 악한 왕 아합이 하나님앞에서 겸비함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재앙을 보지 않기도 했습니다. 거짓회개가 아니라, 통회하며 자복하고 겸비함으로 정직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4.율법을 통한 회개와 구원

 

1)율법책 발견

요시야는 즉위18년 온땅의 우상을 제거한 후, 조부 므낫세와 부왕 아몬의 우상숭배로 더렵혀진 성전을 수리하는데, 성전수리도중, 율법책을 발견하는데, 므낫세와 아몬의 폭정기간중, 누군가가 은밀하게 숨겨둔 것이었습니다. 율법책 발견후, 종교개혁의 한계을 느꼈던 요시야는 더욱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열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말씀이 근거가 되어야만 종교개혁도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도 하나님말씀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2)회개하는 요시야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한 후, 왕의 서기관 사반에게 왕앞에서 책을 낭독하게 했는데, 요시야왕은 율법책낭독은 기쁜 일이었으나, 그 말씀의 내용은 요시야의 가슴을 찢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선지자 훌다에게 요청하는데, 선지자 훌다는 이것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며, 요시야의 겸비함으로 요시야 생전에 이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선포합니다.

 

3)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함

요시야왕은 이 율법책을 백성들앞에서 다시 낭독하고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요시야 왕의 율법준수제안을 받아드림으로써 모든 백성의 지지와 더불어 종교개혁을 더 활성화시킵니다. 특히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모으고 심지어는 멸망한 북이스라엘 10지파들까지도 불러 모아,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립니다. 결국 이것으로 유다는 멸망직전, 잠시동안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앞에서 회개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요시야왕의 행적과 생애에서 종교개혁의 중요성을 봅니다.

종교(교회)는 개혁과 갱신없이 가만히 두면, 자연적으로 인간이 만든 관습, 혹은 죄악과 세속에 물들고 맙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과 순수성을 찾으려는 개혁의 움직임이 있을 때, 빛을 발하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요시야왕에 대한 사전 설명

요시야:Josiah(인명)

[히] WhY:viaOOy(yo'shiyyahu), WhY:viwaOOy(yo'wshiyyahu) (렘 27:1) [그] !Iwsiva"(마 1:10,11) [영] Josiah[여호와는 붙들어 주신다](후원하신다)의 뜻. 다윗왕조 제17대의 유다왕(전 640/639-609재위).그치세는 31년에 걸친다. 그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왕하 22,23대하34,35의각장에보여진다. 아버지 아몬왕이 암살된 후, 불과 8세로 즉위했다. 어머니는 보스갓 아다야의 딸여디다. 청년시대의 조언자는 대제사장 힐기야로서, 요시야는 그 교도에 잘 청종했다. 빠르게도 그 치세의 제 8년부터, 하나님의 뜻따라 생활 행동하기를 원했다. 그치세의 제12년에,우상을 파괴하고, 이교적예배를 금했다. 예배의 순화는 장기간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어서 행해졌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고 있다(왕하 22:1,2,대하 34:1-7,33). 그해 그는 성전의 수리를 명하고, 직공들은 열광적으로 이 공사에 종사하여, 이 목적달성 위해 위탁된 자금을 충실하게 썼다. 이 제18년의 성전 수리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는, 주의 집에서 [율법서]를발견하여, 서기관 사반에게 전하고, 사반은 왕 앞에서 이것을 읽었다(왕하 22:3-14,대하34:8-20). 요시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인민의 배교와 타락을 노하시고, 재화로서 임하실 것과, 요시야는,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춤으로써 이 재화를 만나지 않고서 평안히선조와 함께 잠들 것이 약속되어 있음을 여선지 홀다에 의해 알았다(왕하 22:8-20,대하34:15-18). 요시야를 크게 감동케한 이 예언은 신 28-30장,특히 신29:25-28이었다. 따라서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서에는, 물론 현 신명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5서 전체의 필사였던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문서는, 므낫세의 치세하의 배교와 박해에 의해 파기되었거나, 상실된 것으로 생각되는데(왕하 21:16,대하 33:9),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서는, 성전 소유의 율법의 사본으로, 성소가 더렵힘을 당한 때, 숨겨졌던 것으로 생각된다(신 31:9,26). 또는 고대습관 따라, 성전 건설시, 벽속에 봉납된 율법서였다고도 생각된다. 신명기가 이미 오랜 책이었음은, 그 내용이 이스라엘인의 초대 역사적 생활을 반영하고, 요시야 시대을 반영하고 있지 않는 사실에서 단정된다.요시야는 율법서의 내용을 안 때, 개혁의 열심을 더욱 진기시켜, 제2회의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철저한 우상파괴에 착수했다.

 

예루살렘 성전에 바알,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천체예배 위한 모든 기명을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했다(왕하 23:4이하).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상을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렸다(왕하 23:7). 이 밖에도 전안의 미동(男娼)의 집을 헐고(왕하 23:7), 벤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자녀들이 몰렉의 불에 바쳐지 던 곳)을 배제했다(왕하 23:10). 유다 열왕이 나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단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도 왕이 다헐고, 거기서 빻아 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렸다(왕하 23:12).

 

이 정화는 유다 전토 뿐 아니라, 이전 북방민족이 거하고 있던 지역에도 미쳤다(왕하 23:19,대하 34:6-7). 즉 북 이스라엘 멸망후 앗수르에 의해 정책적으로 특별한 보호를 받던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의 전과 대항하기 위해 세운 벧엘의 제단(왕상 12,13장)같은,유명한성소도 파괴했다(왕하 17:28,23:15-). 이들 일은 요시야가 그무렵 앗수르의 정치적 지배를 사실상 무시하고, 국토를 스르로 통치할 수 있을 마큼 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요시야는 또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헐고, 벧엘에서 우상 예배를 행하던 제사장의 뼈를 취해내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버렸다. 산당의 제사장도 단 위에서 다 죽이고, 해골을 단위에서 불살라 버렸다(왕하 23:16이하). 그리하여 여로보암시대에 행해진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성취되었다(왕상 13:2). 요시야는 유다로 돌아와, 다시 유다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 박수, 드라빔, 우상, 가증한 것을 다제하였다(왕하 23:24). 이렇게 하고 유월절 축제를 성대히 집행하여 종교개혁을 끝냈다. 사무엘 때 이래 이와 같이 엄숙하게 축하된 축절은 아직 없었다(왕하 23:1-25,대하 34:29-35:19).

 

한데, 요시야의 개혁은 외적으로는 철저했으나, 그것이 이스라엘인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음은, 이 시기에 예레미야의 말이 분명히 해주고(렘 2-6장),요시야의사후우상예배가 곧 부활한 것으로도 알게 된다. 요시야는 종교개혁 후 수십년에 걸친 성서의 기록은 없는데, 그 주위의 제국에는 대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요시야는 바벨론과 애굽과의 대립항쟁에 휘말려 들어가, 요시야는 므깃도의 산길에서 애굽의 바로느고를 영격하려다가, 도리어 느고에 의해 쓰러져, 여기서 큰 기대를 걸게했던 요시야의 정치적, 종교적 개혁운동은 종말을 고했다(왕하 23:29).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 깊은 슬픔으로 애도되었다(대하 35:24). 그리고 그는 유다의 최대의 왕의 1인으로서 기록되었다(왕하 23:35). 예레미야는 또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렘 22:15,16), 그의 개혁이 외적으로는 철저히 행해졌으나,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은, 이 시기의 예레미야의 말에 의해 분명하다(렘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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