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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강 이스라엘을 재건한 에스라 admin 201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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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강 이스라엘을 재건한 에스라

오직 야훼신앙으로 2차 포로귀환을 지도한 리더

 

(에스라 7:1-10, 개정) 『[1]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3]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4] 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5] 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 [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7]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

 

에스라(Ezra-조력자)는 BC536년 스룹바벨과 예수와와 같이 포로에서 귀환한 제사장 중 하나이며, 레위인22인중 한 조상(느12:1)이며, 예루살렘성벽을 중수할 때, 성벽위를 행진한 2개조 중의 제1조의 한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의 법률고문을 할 만큼 법에 대해 능통했는데,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서, BC458년에는 1천7백54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인솔하여 제2차 포로귀환을 주도했으며 모세의 율법정신이 상실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율법교육을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포로귀환 즉시,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성벽을 수축했으며 유월절과 오순절을 강조하며 율법을 가르치며 무형의 성전을 세운 제사장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제2의 모세라 부르기도 합니다.

 

1.율법학자 에스라

 

1)포로 귀환후 유대교 창설

하나님은 당신의 분명한 계획속에 이스라엘의 패망과 재건을 진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서 페르시아왕 고레스를 통해 포로귀환을 허락하셨는데, 제1차포로귀환은 스룹바벨(스2:64)을 통해서, 스가랴와 학개의 협력으로 성전건축(BC516년)을 이루셨고, 제2차포로귀환는 법률고문 및 학사자 제사장인 에스라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신앙개혁을 이루셨으며, 제3차 포로귀환은 느혜미야를 통해 성벽중수와 더불어 진행하십니다. 특히 에스라는 느혜미야와 더불어 성벽재건과 신앙재건을 통해, 본격적인 유대주의와 유대교를 창설합니다.(나눔:유형의성전과 무형의 성전)

 

2)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의 방해 극복

포로귀환후, 이스라엘의 족보를 정리한 유대인들은 성전재건을 시도합니다. 이 때,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재건사업에 동참을 요구했으나, 스룹바벨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성과 종족성을 들어, 그들을 거부합니다.(왕하17:24) 유대인의 거부는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결과 사마리아인들은 갖은 방법으로 유대인들의 모함(야훼신앙으로 페르시아에 반역)하며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왕때에는 고소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16년동안 성전재건이 중단되었다가, 성전재건을 포기하고 있을대,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신앙을 독려하여 결국 스룹바벨은 다리오왕 6년에 성전을 봉헌합니다. 이를 위해서, 에스라는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스룹바벨과 더불어,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의 방해를 극복하고 율법의 정신을 강조하며 회개하고, (무형의 성전)을 강조하며 성전을 완공합니다.

 

3)에스라의 인격과 활동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으나, 유대인들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생활에 있었기 때문에, 에스라는 말씀과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가르치며 사역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특히, 에스라는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 왕의 법률고문으로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사마리아인들의 모함으로 성전재건을 중단시켰던 아닥사스다왕이 에스라를 믿고 그를 보내 성전재건과 율법교육을 명하였던 것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라를 적절한 시기에 보내셔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우리는 항상 일꾼이 부족하여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2.종교개혁자 에스라

 

1)아닥사스다의 조서

스룹바벨과 스가랴 그리고 학개는 다리오왕 6년에 성전을 봉헌하고 유월절을 봉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월절 준수를 놓고, 남유다 요시야왕 시대로부터 포로귀환후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민족의 영적상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기록(왕하23:21, 대하35:7) 하고 있는데, 이처럼 율법과 영적인 관심이 고조되었을대, 아닥사스다왕은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그 내용은 유대인중에 귀환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자는 귀환할 것이며, 성전재건과 하나님섬김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제공해 줄 것이며,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가 야훼신앙을 바르게 가진 자는 아니었으나, 제국의 재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일들을 행하였던 것으로 추론합니다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는 이 일의 중요성을 알고 적임자를 찾던 중, 왕의 측근중 신임이 두터운 에스라를 유대인2차 포로귀환의 지도자로 세웁니다.

 

2)오직 야훼 하나님신앙으로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받은 에스라는 매우 기쁘기도 했지만, 매우 부담스러웠기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포로귀환을 준비합니다. 먼저, 포로귀환자 명부를 작성(스8:1-14)하여 사흘동안 아하와 강가에 그들을 살핍니다. 귀환할 무리중에 레위자손이 없음을 알고 성전에 수종들 레위인을 찾아오게 하여 241명의 레위인이 참여함으로 철저하게 귀환을 준비합니다.

또한 에스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왔으므로 왕의 군대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대인의 귀환에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결국 에스라는 모든 귀환 백성들을 향해 금식을 선포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귀환의 길은 매우 멀고 험한 길어었으나, 이들을 해하려 했던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동행하심에 확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3)에스라의 종교개혁

에스라가 예루살렘에서 맨처음 부디친 문제는 이방결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에스라가 아니라 유다방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문제의식을 느겼다가 율법을 강조하는 에스라가 나타나자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이스라엘 민족내부의 갈등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에스라는 자신의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통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에스라의 모습은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시켰고, 백성들은 에스라와 협력하여 (설교자 주:처단과 숙청이 아니라), 문제해결에 나섭니다. 결국 이방인 여자와 결혼한 자들을 조사합니다. 제사장중에서도 이방여인과 결혼한 자들이 있었는데, 아내를 내어 보내고자 맹세시키고 속건제를 드렸으며, 자녀를 낳은 이방인 아내까지도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에스라의 강력한 분리의지는 후기 유대교의 대표적인 특성입니다. (설교자주:룻과 같은 경우는 예외)

 

3.느혜미야와 동역

성경은 에스라의 종교개혁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에스라보다 조금뒤에 사역한 느혜미야시대에도 그 문제가 여전히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라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느혜미야라는 또 다른 지도자를 보냅니다.(제3차포로귀환) 느혜미야는 에스라와 비슷하게 왕의 술관원으로 신임이 두터운 자였으며 다니엘이나 모르드개와 비슷한 직분을 가진 자였습니다. 느혜미야가 총독으로 파견되기 이전에는 산발랏이라는 총독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세력이 위축되는 것을 싫어하여 느혜미야를 괴롭히고 모략합니다. 그러나 느혜미야는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재건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 에스라는 느혜미야와 더불어 경건생활과 새로운 부흥운동을 주도하며 동역합니다.

 

4.율법교육

총독이 된 느혜미야는 율법을 가르칠 에스라를 초빙하여 백성들앞에서 낭독하고 가르치게 합니다. 이 때는 유대인들인 자신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모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던 때이므로 에스라는 히브리어로 말씀을 낭독하고 아람어로 풀어 쉽게 설명하고 가르칩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펼때에 (느8:5) 백성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울지말라 권고하며 그날은 하나님앞에서 즐거움으로 지켜야 하는 날임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근심하고 우는 날이 아니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여호수와 이래로 가장 확실한 초막절 행사를 치릅니다. 이처럼 에스라는 여호와의 날을 통해,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즐거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기 유대교의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여호와의 날=>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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